진보 사상을 가진, 혹은 가졌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같이 공부하자, 생각해보자라는 표현을 대단히 높은 빈도로 사용한다. 말인즉 그 문제에 대해 말하려면 말하기 이전에 어느 정도 수준의 학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오슬로대 교수 박노자씨 역시 진보사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그의 저서 '박노자의 만감일기'에서 말한 바 있다.
뒤집어 해석하면 자신은 '학습한 사람'이란 뜻이 되는 이 말은 위험하다. 우리 사회에서 '학습했다', '배웠다'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이 말은 '나는 너보다 낫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크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차례 수업을 거르고 이한열열사 추모식, 혹은 그런 류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현장을 스치며 무거운 책가방을 떠메고 중앙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다른 학생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혹은 공공연히 그들은 '생각이 없다'고 말하던 '학생 진보사상가'들을 너무도 많이 보았으며 당시엔 약간 동의하기까지 했다.
진보만 학습으로 익히는 사상인가를 말해보자. 진보의 반대말은 보수가 아닌 수구라지만(전영평, 한국정치 색깔 논쟁의 허구, 인물과 사상 2008.3),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진보의 반대개념을 보수라고 부르도록 하자. '보수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사상을 학습하지 않고 익혔을까. '전라도 깽깽이들은 안돼', '그래도 한나라당이 경제는 살리잖아', '말뿐인 노무현이보단 이명박이가 그래도 낫지' 등등. 어쩌면 언급의 가치도 없는ㅡ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ㅡ말들을 경험하는 것은 학습이 아닌가. 꼭 고상한 서적들을 뒤적이고 세미나란 이름의 사상유희를 하는것만이 학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6차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온 진리 획득의 1차적 수단을 무시하는 처사다. 어느 것이 더 고상하느냐, 어느것이 고차원적이냐의 문제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을 따진다는 자체가 이미 어느 것이 좋다라는 편협한 사고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숱하게 들어왔던 말들. "학생이라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생이라면 당연히 사회 참여적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좋다. 나도 대단히 좋아했던 말이고 공부하지 않던 시절에 위안을 주었던 말이기도 하며, 먹물튀기는 척 해보려고 써본 적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밥벌이보다 숭고한 남자의 일은 없다'란 김훈의 말에 더 가까이 와있다. 남자로 한정지은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사회 참여적이었던 학생들, 그 중에서도 민주화의 선봉에 섰다던 연대생들은 모두 간신히 졸업만 하는 정도의 학점, 그리고 자격증란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이력서로도 밥벌이의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보란듯이 무난하게 취직했다. 다른 대학생, 연정공 등의 커뮤니티에서 '지잡대'로 불리는 학교의 학생들도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지금보단 어렵지 않은' 정도로 취업하곤 했다. 취업만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수많은 386세대들은 정치계로 진출하여 참여정부의 주축을 이루기도 하는 등 그들의 학생시절의 운동경력은 득이되었으면 득이 되었지 민주화 이후로 그들이 학생운동때문에 손해본 점은 없다. 역사적으로 학생들은, 그 당시에는 모두가 자각하지는 못했겠지만, 학생운동으로 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배들에게 끌려다녔을지라도, 끌려가는 것이 끌려가지 않는 것보다는 득이 되었으니까.
상황설명이 적절했는지 모르겠으나 '밥벌이의 숭고합'을 신봉하는 학생들을 무시하는것, 심적으로나마 무시하는 것은 또한 위험한 일이다. 그 부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는 개인의 자유지만 때때로 개인적인 감정은 공적인 배제로 연결되기에 가끔 폭력적인 문제로 치닫기때문이다.
공론은 아니지만 논의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음 아고라, 연정공 같은 곳에서라면 익명성을 담보로 거침없는 논의가 벌어지지만 좀더 작은 단위, 이를테면 반학생회에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내가 아는 어떤 반학생회를 말해보자. 그 반에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 커뮤니티는 익명성을 띄지 않기 때문에ㅡ익명게시판에서 논의하지만 그 논의의 대상은 실명을 가지고 있다ㅡ실제 집단이 존재하는 반안에서 온라인적 논의는 서로의 악감정을 키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의 숱한 경험을 통해 커뮤니티를 공론의 장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번 대화의 장을 만드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진보적인 선배들이 적극 동참하는 반면 보수적인 선배들은 밥벌이가 너무나도 숭고했던 탓에 문제해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보수들은 그 대화의 장에 지고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는 쪽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원인을 찾자면 선배의 권위, 그 개인이 권위적이건 그렇지 않건 그 권위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1차적 혹은 궁극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진보가 겪는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의 말과 행동의 싱크로율을 높이는 것이 극단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지적하고 바꾸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장애학우가 도움을 청해올 때 약간은 짜증을 느끼고, 학벌주의의 가장 1차적인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 과외로 돈을 벌고, 자본주의의 선물인 쇼핑을 하며 행복감을 느끼고, 반미사상을 깊숙한 곳에 가지고 있지만 군대에 가면 웅변대회같은 것이라도 열릴 때 주한미군의 필요불가결함을 역설하여 포상휴가증을 한장이라도 더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그들도 밥벌이의 중요성을 간과할수 없어 취직하고 만다는 현실. 그 현실과 사상의 내적 갈등을 겪는 것은 본인에게 무척이나 괴롭겠지만 보수측에서 보면 단지 '웃기지도 않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뭔가...
왼손과 오른손의 악수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포크를 잡는 왼손과 나이프를 잡는 오른손 처럼 서로의 역할을 만들어 가는 것...그리고 개인적으로나마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이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앞서의 썰이 지극히 경험적이고 구체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결론은 극도로 추상적이고 실질적이지 못한 탓에 난 이 글에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