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달았던 몇몇 리플들에 대한 반응을 보며 내 '딴죽의 체계'를 설명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분야에 대해 코멘트를 달아도 '까칠하다'는 반응을 듣는 나를 스스로 변호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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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critics 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관심을 전제한다. '한 대상에게 가해질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 비평은 일종의 관심표현이며, 관심대상에 대한 격려이자 다독거림이다. 같은 맥락에서 비평대상의 각성이나 발전을 유도하지 않는, 흠집내기가 주가 되는 비평은 좋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정치비평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대통령의 어떤 정책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라는 최소한의 형식도 없는 무차별한 '까대기'가 웹상에서 난무한다. 쥐를 닮았기 때문에 싫다, 마릴린 맨슨같다식은 예의를 갖춘 편에 속하는데, 그러면서도 대다수는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해야한다는 최소한의 내면기준도 갖추지 않고 있다. 단순히 이건 싫다. 저건 나쁜 정책이다 등의 지적만 늘어놓을 뿐이다. 정작 자세히 물으려 하면 '정치는 관심없어'로 일관하기 일쑤다. 좋은 정치 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비평자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정치상 혹은 정치인상을 그려줄 수 있어야 한다. 난 그것이 어렵고 또 두려워서 사회비평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으며 살고 싶어서 이명박님을 좋아하려고 노력중인데 눈코입이 없으면 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좋은 비평'을 하지 않는 개인은 좋은 비평의 어려운 몫을 또 다른 정치인에게 돌리고, '말은 잘한다'따위로 이죽거린다. 남의 약점찾기 바쁜 그들은 '개인은 약하다'는 생각을 하며 투표하지 않고, '소시민은 무력하다'며 많은 사회악을 모르는 척 하며, 그가 처했더라면 그와 똑같이 행동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의롭지 못했던 다른 개인을 거리낌 없이 공격한다. '본인의 사정'은 지상 최고의 면죄부가 되고, '타인의 사정'의 사정은 물어볼 것 없이 최악의 변명거리가 된다.
공직자윤리를 말하던 어떤 글을 보고 한심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직업윤리가 필요한 것은 비단 공직자뿐만이 아닌 현실에서 유독 공직자에 대해서만 직업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법으로도 규제받지 않는 수많은 빅 브라더들과 신의 아들들이 숨쉬는 사회에서 소시민에 가까운 공무원을, 그것도 그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비윤리적이다라는 이유로 비난할 수 있을까? 그분은 결국 신문칼럼 쓴답시고 잘난척한 것에 불과하다. 아니면 대한민국을 법이 아닌 윤리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거나.
그 반면 엉터리 칼럼을 연재한 신문담당자나 칼럼니스트를 이해하자면 이해할수 없는 일도 아니다. 칼럼니스트도 분명 다른 주된 직업이 있을 테고, 매주 쓰는 글에게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담당자 역시 촉박한 시간여유를 가지고 원고를 교정하고 칼럼니스트와 원고의 조정을 하고 결제까지 받아야 할 테니 그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내가 어쩌다 읽은 글이 어설펐다고 난리치는 걸 얘는 또 왜이럴까 하며 골치아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에 '내가 염세적이라면, 염세적이지 않은 어른들은 바보야'라는 말이 나온다. 분명 사회는 나를 염세적이지 않을 수 없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애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한 가르쳐준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굳이 이해하자면 못할것도 없기도 하다. 내 이해가 상대에겐 오해가 되기도 하겠지만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빛바래는 일은 또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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