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들은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군대에 있다고 해서 딱히 불행한 경험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고참 두어명을 위해 소대원 전체가 말을 만들어야 하는 이런 시절이 있는가하면

이런 시절도 있듯이..
무슨말인고 하면 이번주 '한겨레21' <권혁범의 세상읽기>에 나온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이야기다. 군필자는 기득권층이다. 장애인들은 군대에 가지 못하고 여자들은 징병되지 못하니까. 군대에 갈수 있는건 20대 신체 건강한 남성. 그들이 2년간의 시간을 바치고 시련을 겪으며 얻는 것은 전역증이라는 무시할수 없는 권리다.
나는 군대 갔다온지 한달이 조금 지났지만 아직 군대에 다시 들어가는 꿈이라거나 일어났는데 모포를 덮고 있는 꿈같은 건 꿔본 적은 없다. 딱히 구타당한 적도 없고, 군대얘기하면 별로 할 것이 없을만큼 편한 군복무를 했다. 2년 쉰다는 생각도 군복무중에 여러번 했고 지금도 2년 잘 쉬었다고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다시 가라고 하면 못간다. 아무리 좋았다고 입으로 천번을 말할 수는 있어도 단 하루도 다시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정작 나는 '군필'이라는 권리를 비교적 쉽게 얻었음에도 군대가지 않은 남자들을 하시하며, 군대갔다오지 않은 것들은 '안된다' 라고 생각한다. 이중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기득권을 갖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기득권이라고 인정할 수 없으며, 가끔 군대에 갈 수 있는 권리 운운하는 여성주의자들의 찌라시를 볼 때마다 니네는 가보고 그런소리 하라며 치를 떤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지 않는 이유를 권혁범 선생님은 '분단체제와 개발독재가 만들어낸 국가안보의 신화와 국가주의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 이라고 했지만,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선뜻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한다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양심만 고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부대에 있던 어떤 고귀한 양심의 소유자는 미친척을 하면서까지 집에 갔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고, 미친 척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총을 들기 싫은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건 분단 특수성에서 강조된 국가주의나 전체주의가 아니라 공평성의 문제다. 그 양심의 정도가 정도가 덜하거나 심하다고 해서 그 대체복무를 시켜주느냐 마느냐는 사람이나 제도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렇지만 정작 실제로 대체복무제가 도입한다면 난 별 무리없이 찬성한다. 제도를 악용해서 병역기피를 하는 사람들 물론 생길 것이지만 권혁범 선생님 말처럼 군대 안갔다온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페널티, 핸디캡에 가깝기 때문에 별 문제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처럼 쉽게 병역기피라는 것을 할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군대안갔다온 '것'들은 군대 다녀온 나같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할테니까.
문제는 그 제도를 도입하느냐 마느냐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색안경을 끼지 않고 볼 수 있느냐는 인간적인 측면이다. 대체복무 했습니다. 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앞에두고 '난 갔다왔고 넌 안갔다 왔다'라는 문장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수 있을까? 제도적으로 차별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온전한 성인으로,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것이 내가 버리지 못하는 이 기득권의 실체다.
이걸 어떻게 해야 버릴 수 있을지 난 모르겠다.

고참 두어명을 위해 소대원 전체가 말을 만들어야 하는 이런 시절이 있는가하면
이런 시절도 있듯이..
무슨말인고 하면 이번주 '한겨레21' <권혁범의 세상읽기>에 나온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이야기다. 군필자는 기득권층이다. 장애인들은 군대에 가지 못하고 여자들은 징병되지 못하니까. 군대에 갈수 있는건 20대 신체 건강한 남성. 그들이 2년간의 시간을 바치고 시련을 겪으며 얻는 것은 전역증이라는 무시할수 없는 권리다.
나는 군대 갔다온지 한달이 조금 지났지만 아직 군대에 다시 들어가는 꿈이라거나 일어났는데 모포를 덮고 있는 꿈같은 건 꿔본 적은 없다. 딱히 구타당한 적도 없고, 군대얘기하면 별로 할 것이 없을만큼 편한 군복무를 했다. 2년 쉰다는 생각도 군복무중에 여러번 했고 지금도 2년 잘 쉬었다고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다시 가라고 하면 못간다. 아무리 좋았다고 입으로 천번을 말할 수는 있어도 단 하루도 다시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정작 나는 '군필'이라는 권리를 비교적 쉽게 얻었음에도 군대가지 않은 남자들을 하시하며, 군대갔다오지 않은 것들은 '안된다' 라고 생각한다. 이중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기득권을 갖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기득권이라고 인정할 수 없으며, 가끔 군대에 갈 수 있는 권리 운운하는 여성주의자들의 찌라시를 볼 때마다 니네는 가보고 그런소리 하라며 치를 떤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지 않는 이유를 권혁범 선생님은 '분단체제와 개발독재가 만들어낸 국가안보의 신화와 국가주의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 이라고 했지만,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선뜻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한다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양심만 고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부대에 있던 어떤 고귀한 양심의 소유자는 미친척을 하면서까지 집에 갔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고, 미친 척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총을 들기 싫은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건 분단 특수성에서 강조된 국가주의나 전체주의가 아니라 공평성의 문제다. 그 양심의 정도가 정도가 덜하거나 심하다고 해서 그 대체복무를 시켜주느냐 마느냐는 사람이나 제도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렇지만 정작 실제로 대체복무제가 도입한다면 난 별 무리없이 찬성한다. 제도를 악용해서 병역기피를 하는 사람들 물론 생길 것이지만 권혁범 선생님 말처럼 군대 안갔다온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페널티, 핸디캡에 가깝기 때문에 별 문제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처럼 쉽게 병역기피라는 것을 할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군대안갔다온 '것'들은 군대 다녀온 나같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할테니까.
문제는 그 제도를 도입하느냐 마느냐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색안경을 끼지 않고 볼 수 있느냐는 인간적인 측면이다. 대체복무 했습니다. 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앞에두고 '난 갔다왔고 넌 안갔다 왔다'라는 문장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수 있을까? 제도적으로 차별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온전한 성인으로,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것이 내가 버리지 못하는 이 기득권의 실체다.
이걸 어떻게 해야 버릴 수 있을지 난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