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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자에게 편지

원래 남자한테 편지 쓰는 거 안좋아하는데, 어쩔 수 없지. 1년같이 살았는데 잘가 인사는 해야잖아. 전역은 찬찬한 앞날로의 일보전진과 동의어가 아니지만 음침한 세계와의 이별 정도는 되니까. 축하할 만 하네.

인생을 니가 좋아한다던 수학과 비긴다면, 답을 아무도 모르는 문제라고 하더만. 그런 말 하는 사람 중에도 인생의 공식을 찾아 헤메는 인간이 있기도 하고 두세개 정도 답 구해놓고 어느 게 맞는지 갈등하는 사람도 있고, 날 때부터 답은 이렇게 구하는 거라고 배워서 그대로만 살다 시험 끝날때쯤 아차 하는 사람도 있고, 도저히 각 안나오는데 마지못해 아는 공식 이것저것 써보다가 '아 이건 아닌데' 하며 다시 풀 시간 없어 그냥 답안제출 하기도 하고, 옆사람꺼 베끼다가 중간에 몇자 틀려서 완전 망하기도 하고, 난 이딴 거 풀어줄만큼 도량이 넓지 못하다며 백지내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고, 한참 뚫어져라 문제만 보다가 답 맞춰서 천재소리 듣는 사람도 있겠지.
나라면 유력한 정답후보 세개쯤 골라놓고 ㅡ 0 이나 1같은거 ㅡ 어느걸 쓸지 고민하가 0.5 써서 틀리는 타입이겠지. 어차피 시험이 끝날 때까진 내가 답인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텐데.

요즘 나랑 놀고 있는 다나카 요시키가 <은하영웅전설>에서 나에게 한 말을 빌리자면 '운명은 수많은 개인의지의 합이 뿐'이야. (생각난 대로 쓴 거라 정확한 문장은 아니다만) 무릎을 치고 싶었는데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관뒀다만. 운명이란게 정해진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고 나누는 걸 마땅찮다고 생각했으나 적절한 정의를 못 내리고 있던 차에 좋은 말 들은 거지. 인생에서 할 일이 있다면 내 운명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타의지에서 자의지의 비중을 높이는 것, 타의지에 묻히고 휩쓸리지 않을 자의지를 만드는 게 아닐까 한다. 객관적인 성공이야 어쨌든 자의지란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중요하니까.

편지를 쓴다고 휘적거렸는데 독백이 되어버렸다. 편지는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건데. 그럼 하고싶은 말 한마디 정도만 쓰지 뭐. 전역 축하하고, 주도적인 인생 살길 바래.



2007. 7. 18 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