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는 문학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은 '흥미'라고 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봐지는 혹은 들어지는 영화에 비해 문학은 여러 사고작용을 필요로 한다. 책을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영화나 연극을 끝까지 보는 것에 비해 대단히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흥미를 끌지 못하는 문학이 소비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끝까지 읽히지 않는 문학은 심하게 말해서 가치가 없다.
나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들 때 가볍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든다. 버스에서 읽거나, 공부하기 싫을 때 언제든 꺼낸다. 날 어렵게 만들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라기엔 몇권 보지 않았지만)
그런면에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적잖이 껄끄러운 소설이었다. 매 장면장면마다 마약과 혼음의 환락세계가 펼쳐지고 주인공 류는 너무 구체적으로 떠올라서 읽기에 역겨울정도로 사진찍듯 상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덮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여러번 했지만 금방 읽겠다 싶어서 대강대강 넘기는 쪽을 택했는데, 뒷부분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이 나왔다.
릴리, 나 돌아갈까? 돌아가고 싶어. 어딘지 모르지만 돌아가고 싶어. 분명히 난 미아가 되어버린 거야. 좀 더 시원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옛날에 그곳에 있었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릴리도 알고있지?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는 큰 나무 아래 같은 곳.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여기가 어디야?환각상태의 류는 이어지지 않는 막연한 문장들의 나열로 향수를 설명하고 있다.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 돌아가고 싶다. 여기가 어딘지 알수 없다. 그 시절이 어땠는지 기억하기보다 일단 지금을 벗어나고 싶다. 설명할 수 없지만 지금이 싫다고 류는 말하고 있다. 의미있는 문장일 듯 해서 서문을 다시 읽었다. 무라카미 류는 서문을 쓸때 중요한 부분을 친절하게 짚어주는 분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70년대 중반의 일본 현실을 설명하고 있다.
30년전 내가 아무런 자각을 포함시키지 않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상실감'이다. 1970년대 중반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그 대신에 무엇인가를 잃었다. 이뤄낸 것, 그것은 일본 고유의 문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근대화 달성이라는 대(大)목표였다. 하지만 일본 민족은 목표를 잃었다.일본 독자적인 문화와 근대화의 충돌에서 벌어지는 시대인 1970년대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은 불안감의 상징과도 같다. 매일 수도 없이 다양한 마약들을 접하고 아무라도 상관없다는 듯 관계를 갖고 그러다 문득 다투고 헤어진다.
류는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혼자 정지한듯 멈춰 장면장면들을 사진찍듯 묘사하며 독자의 구토증세를 유발한다. 지금이 좋은지 이대로가 옳은지 뭘 잊고 있는지 류는 자꾸만 물어본다. 그리고 '검은 새', 내 도시를 파괴한 '검은 새'에 대한 반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릴리에게 새를 죽여달라고 한다. 방금전에 벌레를 눌러죽인 류는 검은 새를 두려워하며 도망가려고 한다. 작가는 검은 새 앞에 놓인 류를 통해 전후 일본을 말하고 있다.
마는, 솔직히 30년전 남의나라 일따위 별로 와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