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나를 기다려 준 소설

wnsgml 2007. 10. 29. 19:15
어느날 <좋은생각>에서 글을 읽었다. 어느 날이라고 하지만 그날은 워낙 할일이 없어서 책꽂이에 있던 좋은생각 하나씩 보고 있었다. 한권당 30분? 그저 하나씩 훑을 땐 모르는 데 연속해서 여러권 보다보면 소설가분들이 수필기고를 대단히 많이 하신다는 것. 대부분 자기 만족성 글... 작가들은 직업 만족도가 대단히 높다.

이게 바로 문제의 글.
이해경 님이 쓴 <나를 기다려 준 소설>이란 글이다.

 열다섯 살 때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소설을 즐겨 읽기는 했지만 그 시절엔 누구나 그랬다. 노력이 따르지 않는 의지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우스운 건 좋은데 문제는 그것이 가짜라는 데 있다. 나에게 진짜 소설을 쓰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국문과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자는 무지할 수밖에 없다.

 나의 대학 시절은 자기 인생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심한 청춘들의 황금기였다.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핑계삼아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의지마저 슬며시 내려놓고 이십대의 팔 할을 빈둥거렸다. 문제는 소설뿐아니라 다른 어떤 일도 할 준비가 안 된채 사회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졸업 직후부터 마흔 살  직전까지 지겨운 줄 모르고 살 수 있었다. 학교 교사, 백수, 영화전공 대학원생, 학원강사, 웹진 운영자, 온라인회사 임원.

 은근히 다채로운 경력을 자랑하고 싶은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별로 다채로울 것도 없는 그 이력은 감추고 싶은 나의 치부이다. 그중 한가지라도, 탁월하게는커녕 근근이라도 해나갈 수 있었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가 되어 원고를 청탁받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하는 일마다 나는 실패했고, 백수로 살기에도 나는 무능했다. 준비하는 노력 없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없다. 세상은 정확하다.

 서른아홉 살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곧 그것이 잘못 안 것임도 깨달았다. 이십 년 넘게 시작도 안하고 팽개쳐 둔 소설이 곁에 남아 있었다. 문제는 소설을 연습할 시간까지는 남아 있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게는 연습이 곧 실전이었다. 결국 나는 '준비 안 된' 소설가가 되었고, 지금도 그 값을 톡톡히 치르느라 낑낑대며 살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지.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일이 있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그중 한가지라도 하며 사는 인생은 불행하지 않다. 하물며 지금 나에게 소설은 그 세 가지 다인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왜 소설을 쓰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만큼은 나도 준비되어 있다. '폐인이 되지 않기 위해.' 돌아보면 딴 짓 하며 돌아다닌 지난날이 다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의 세월이었다. 아니라면 나는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나를 버리지 않고 기다려 준 '나의 일'에게.
글의 구성은 뭐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더 할 말이 없겠고.

내가 생각했던 소재들 여러 개를 다 써서 쓴 글이라 처음 봤을 때 어떤 찌릿함을 느꼈다. 굵은 글자로 쓴 부분. 내가 잘난 척 하려고 하면서 여러 번 말했거나, 어떤 글의 소재로 썼거나, 그 당시 머릿속을 맴돌던 것들이라니 믿어질까.

특히 '다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의 세월' 부분을 보고는 표현을 도둑맞은 느낌마저 들었으니. 저 사람은 어떻게 나랑 똑같은 생각들을 모아서 글로 엮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 인상적인 수필. 곱게 찢어서 다이어리에 끼워놨다.